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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가진 인물 중 하나, 이재명.
그는 흔히 “흙수저를 넘어서 맨손으로 기어 올라온 사람”이라 불립니다.
오늘은 이재명의 출생과 고향, 그리고 눈물겨운 어린 시절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이재명의 출생일은 1963년 음력 10월 23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가난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셨고, 결국 점쟁이를 찾아 생일을 정했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생일을 정해야 했던 상황,
그의 가족은 점집을 찾아 **'적당히 좋은 날'**을 생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공식 호적상 생일은 1964년 12월 22일로 등록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날짜는 독립운동가 이재명이 이완용을 처단하려 했던 날과 같아
'이름값을 하겠다'는 상징성도 엿보입니다.
이재명이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도촌동 지통마,
지금의 안동시 청량산 자락, 영양군·봉화군·안동시가 만나는 험한 산골마을입니다.
그는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지만 누나 둘이 요절하면서 다섯째가 되었고,
어린 시절은 가난과 결핍, 그리고 교육에 대한 갈증으로 점철된 시기였습니다.
지통마 산골에서 초등학교까지는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거리였고,
길도 험했기에 결석이 잦았다고 합니다.
“선생님한테 너무 많이 맞아서, 나도 선생님이 돼서 애들을 때려보겠다는 복수심이 꿈이었다.”
순수하지만 슬픈 고백이었던 어린 시절의 꿈.
그만큼 그는 당시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된 현실에 처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초등학교 졸업 직후, 가족은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으로 이사합니다.
하지만 이사 후에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학교 진학 대신 소년공이 되어야 했습니다.
첫 직장은 염산을 다루는 목걸이 공장,
두 번째는 황동땜 공장,
세 번째는 고무벨트 공장이었는데 이곳에서 왼손 중지에 산재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후에도 산소용접·함석절단 작업 중 손등 찢어짐,
프레스 공장에서 손목이 으깨지는 부상,
산재와 구타로 인한 난청과 청각장애,
결국 그는 팔이 비틀어진 채 성장하는 장애 6급을 얻게 됩니다.
그의 일기장엔 이런 문장이 남아있습니다.
“나 같은 팔 병신은 군역이 면제될 텐데 그럼 난 어쩌란 말이냐.”
그만큼 그는 가난 때문에 강한 소년이 되어야 했고,
공장의 위험한 기계와 구조 속에서 몸과 마음이 다쳐갔던 시기였습니다.
이후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그의 팔을 본 군의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새끼 이거, 개판이네…”
그조차도 웃으며 살아남으려 애썼던 과거였고,
그는 훗날 “가난보다 더 미웠던 건, 내 꿈을 막았던 아버지”라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대선 후보 중, 이처럼 심각한 빈곤과 부상을 딛고 올라온 사례는 드뭅니다.
이재명은 출생일조차 정해지지 않은 아이였고,
교복도 입지 못한 아이였으며,
몸에 흉터가 가득한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합니다.
“그때의 고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아마도 그 시절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이재명의 고향과 어린 시절은 정치인의 서사라기보다, 한 인간의 생존기입니다.
그리고 그 생존은 지금도 그를 ‘서민 정치인’으로 남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죠.
📌 혹시 여러분도 어린 시절의 기억 속 가난과 싸워본 적이 있나요?
이재명의 삶은 누군가에게는 위로, 누군가에게는 경고가 될지도 모릅니다.